2020년 12월 27일 인쇄
2021년 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21년 1월호 통권 539호 |2026년 10월 30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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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자 金賢慈
출생 : 1947년 경남 진주
학력 : 이화여대 무용학과 졸업
경력 : 마사 그레이엄 센터 연수(1983) 부산시립무용단 상임안무자(1976-1982) 전 부산대 교수, 무용원 교수(1997 -). 한국창작무용단(럭키창작무용단으로 개칭(1988년 해체됨)) 창단(1985), 김현자아카데미 발족 새남무용단 창단(1985), 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2002-)
수상 : 제1회 대한민국예술상 신인상(1969), 「서울무용제」 연기상(1982), 「대한민국무용제」 대상(1984, 『홰』). 문예진흥원지원금 수혜(1989, 『생춤』)


작품활동
출연작
『황진이』(1969, 무용극, 데뷔작) 『명성황후』(1996, 국수호 안무) 『오셀로』(1996, 국수호 안무) 외 다수
안무작
『심청이야기』(1975) 『갯마을』(1977) 『하늘에 피는 꽃』(1977) 『달과 까마귀』(1977) 『다정』(1977) 『여자 새되어 울다』(1980) 『홰』(정재만 공동안무, 1984) 『황금가지』(1985) 『분리에서 합으로』(1986) 『윤사월』(1986)『바람개비』(1987) 『생춤』(1989)『회일』(1990) 『만남』(1992) 『샘』(1995) 『메꽃』(1996) 『모란관찰』(1998) 『십오야』(1999) 『바다』(2000) 『누항(陋巷)의 끝』(2002) 『그 물 속에 불을 보다』(2002) 『비어있는 들』(2003) 외 다수
저술활동
저서
「생춤의 세계」(1992)
실험정신이 미약하던 한국무용 부문에 새로운 방식의 몸 움직임을 모색하고 그를 통해 상당한 미학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김현자는 「생춤」(lived dance)이라는 유니크한 춤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공립, 민간 무용단들을 맡아 이끌면서 그는 단원들에게 항상 명료한 도전의식과 하드 트레이닝을 요구하였다. 그는 때로는 비약적인 관점으로 춤의 근본을 캐물어 간 결과 춤의 궁극적인 최극소점으로서 생명과 몸을 재인지하게 되고, 이를 토대로 한국무용에서 실험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는 4세 때부터 남성 무용가 황무봉으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황무봉은 한국무용을 비롯 여러 장르의 춤을 가르치는 것으로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그는 대학 입학 때까지 김좌진, 이매방, 김백봉, 송범, 한영숙 등의 무용가들로부터 한국무용의 『승무』, 『장고춤』, 『5북춤』 등을 섭렵하였고 발레와 현대무용, 스페인 무용도 익혔다. 또한 무용극 「황진이」에 출연하여 무용가로 데뷔하였다. 몇 년 후에 그는 무용학원을 설립했으며 1975년 한국의 전통설화인 『심청 이야기』를 안무하였다. 이를 계기로 20대의 나이에 1976년 창설된 부산시립무용단의 첫 상임안무자로 뽑혀 1982년까지 주로 무용극들을 창작하였다.
그녀는 한국무용에서 통용되던 획일적인 춤 동작을 벗어나 현대성을 투여하는 방향으로 창작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김현자는 한국 민속무용의 주요한 춤동작들에서 각기 전형적인 미감에 착안해서 그것을 현대적 무용 언어로 개발하는 작업을 계속하였으며, 무대에서는 감정이입의 연기를 강조하였다. 그가 영남 지방의 무대화되지 않은(non-theatrical) 민속춤 동작을 무용 언어 개발의 토대로 삼은 사실은 자연성에 가까운 움직임을 추구하는 장래의 작업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부산시립무용단 상임안무자로 있을동안 부산에서 춤 공연은 되살아나고 춤 공연이 서울에 심하게 편중되어 있던 그 시대에 부산의 무용을 서울을 비롯 전국에 재인식시켰다. 1982년 「서울무용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것도 그 일환이다.
이후 김현자는 한동안 춤적 상상력의 돌발적 개입들을 허용하는 세계를 갖는다. 1984년 「서울무용제」에서 『홰』로 대상을 수상하였을 때는 간결하며 명료한 구성으로 신선한 즐거움을 안겨준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이전부터 여러 차례 함께 무대 출연한 바 있은 남성 무용가 정재만과 함께 창작한 『홰』는 남녀 사이의 갈등을 암탉과 수탉의 갈등으로 은유한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보다 내용을 뒷받침하는 무용언어를 전통적인 미감을 갖되 전통적이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펼쳐낸 점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이때까지는 한국의 무용계에서 요령있는 안무자로 주목할 만한 무용가 정도로 알려지고 있었다.
럭키무용단 시절인 1986년 김현자는 『황금가지』를 발표하고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욕망으로 인한 인간 상실이 주제인 『황금가지』는 김현자와 약속이나 한 듯이 한국무용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무용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무대 한국무용에 필수품목으로 여겨진 한복을 벗어던진 무용수들은 무대에서 발레, 현대무용과 잘 구분되지 않는 한국무용에 열중하였는데, 그 과감성은 사실상 어떤 원초적 지점에로 회귀하려는 어떤 열망과 다름없었다. 작품 구성에서의 연결 부족처럼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황금가지』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몸의 생생한 기(氣로)로서 주저하지 않고 표출한 작업으로서 춤의 궁극적 근원과 맞닿아 있었다. 무대에서 한국무용가들을 오랫동안 눌러 왔으나 몇 안 되는 무용가들이 그전부터 맞섰던 중압감에 보다 가시적인 균열이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아메바 같은 그로테스크하되 역동적인 형상이나 엑스타시적 몸짓이 『황금가지』의 주도 동기 구실을 했을 때 많은 이들은 예술적 한국무용에서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들었던 반면에 오히려 어떤 이들은 이를 한껏 즐겼고 실험 정신의 뒤늦은 소생으로 받아들였다. 대체로 『황금가지』는 한국무용의 현대화, 혹은 현대 한국무용의 모색에서 종착점이 아니라 시발점이 되었으며, 그후 무대화된 창작 한국무용에서 현대발레나 현대무용과의 변별점을 찾기 어려워진 현상이 이를 뒷받침한다.
1987년 6월에 그는 현대의 정경을 대대적으로 도입한 『바람개비』에서 현대의 즉물성에 메스를 가하였다. 『바람개비』는 그 내용보다 한국무용의 무대 연출에서의 기존 선입견을 말끔히 씻고 한국무용에 극장성을 적극 도입한 점에서 더 큰 의의를 가졌다.
1989년 5월 그는 「생춤」 개념 아래 두 작품을 공연하였다. 커다란 얼음 덩어리 위에 앉은 김현자는 상체를 가다듬어 호흡하였으며 얼음 주위의 무용수들은 녹아나는 물에 서서히 젖어들면서 생리적 충동이 시키는 대로 바닥을 휘젓고 다녔다. 일체 기교가 배제된 동작들은 없음(비존재)에 대한 동조 반응으로서 ‘에너지의 생성과 소멸이 하나’라는 윤회의 철학을 급진적으로 실연해 보여주었다. 후반부에 그들은 다시 흩날리는 종이들과 함께 무위의 세계로 침잠하였다. 계산된 안무보다 몸, 즉 기의 운행에 움직임을 일임하는 이 기법의 춤은 「생춤」이라 명명되었다. 그의 춤의 실험은 우선 의식보다 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자유자재의 안무를 발견하는 작업으로 방향을 잡았다. 즉흥적 충동에 의지하면서도 몸에서 우러나는 동작으로 춤의 질감을 깊이있게 드러내는 한국의 신명 춤은 그에게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김현자의 춤 실험에서 귀착점은 동작의 자연스런 운행이었다. 주로 춤추는 자의 입장에서 정리된 생춤 논리는 이후 김현자의 창작을 주도하였다.
1992년 7월 그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공동 무대를 가졌다. 여기서 두 사람 사이의 계산된 가시적인 공존 순간들은 미미했던 반면 김현자가 푸닥거리를 염두에 두고 풀어낸 섬세한 떨림이나 얼음 녹은 물에 흠뻑 젖으며 마치 명정(酩酊)의 상태에서 춤에 몰입하는 듯한 모습은 생춤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1992년 그는 「생춤의 세계」도 출간하였다. 기사상과 자연주의에 기저를 두고 기존의 춤을 해체하는 그의 작업을 두고 무용계에서는 이론(異論)이 분분하였다. 생춤의 개념은 무엇이고 과연 그것은 가능한지, 그리고 생춤은 다른 춤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와 같은 의문들이 표시되었다. 심지어 그것은 일정 정도의 테크닉을 동반해야 성립할 수 있는 춤의 급진적인 포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표명되기도 하였다.
1995년 가을 그는 두 편의 소품을 발표하였는데, 이 소품에서 무용수들은 제자리에서 때로는 천천히 돌아서 자리를 이동하면서 점차 동작의 분량을 불려 나갔다. 다시 말해 기(氣)가 증대하는 양상이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식별되는 작품이었다. 다소 이질적인 이들 두 소품이 하나의 생춤 개념으로 묶여졌다는 사실은 생춤이 기와 의식 사이의 단절을 전제로 기의 충동적인 자극에 몸을 내맡기는 춤이 아니라 무엇보다 춤의 근원인 기의 운행에 토대를 두고 의식의 선입견을 절제하면서 움직임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김현자의 의도를 보여 주었다.
1998년의 『모란 관찰』에서 무용수들은 의식을 조절하며 엄정한 질서 감각을 갖고 부유하듯 하면서 꽃이 피고 지는 시적이며 소담한 정경들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한 여인이 행하는 씻김 의식을 그린 1999년의 독무 『십오야』에서 바닥으로부터 몸통 그리고 팔로 전달되는 움직임의 자극들은 팔을 들어올리고 발을 떼서 나가는 기의 정제된 행로를 갖고 있었다.
2002년의 『누항(陋巷)의 끝』은 『모란 관찰』과 비슷한 맥락의 작품으로 소재에 있어 『모란 관찰』이 모란꽃의 비유적 표현에 있다면, 『누항(陋巷)의 끝』은 깊은 가을 떨어지는 낙엽의 생로병사를 그리고 있다. 무용수들이 가을 낙엽으로 환원되어 움직임의 언어적 승화를 모색한다.
자연이나 사물에 대한 직접적 모사(模寫)형식을 취하지만, 그 속에 철학적, 또는 사색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은 그녀의 최근 작품이 가지는 큰 매력중 하나이다. 특히 9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 이러한 특징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누항(陋巷)의 끝』 역시 표면적으로는 가을 낙엽이 누추하게 퇴락해가는 모습을 인생사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지만, 누항이라는 단어에 서려있는 도(道)를 망각한 ‘그만그만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대’라는, 속 깊은 의미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2003년의 『비어있는 들』에서는 한편으로는 춤의 순수 서정성을 유지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춤의 현대적 표현성을 시도해 보려는 예술적 노력을 인상 깊게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순수 서정성을 자연견하고 인간성과 자연성을 상호교응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동양적 인물상동(人物相同)의 세계관을 선명히 드러내었다. 또한 흥미롭게도 춤의 형식적 전개에 있어서 발레적 구성미를 응용하고 있었다. 국립무용단의 많은 작품들 중 순수서정성과 표현성을 결합, 안무자의 미학관과 인생관을 선명히 표현한 흔치 않은 예에 속할 것이다. 더불어 이 작품은 춤의 명상력, 사생(死生)능력, 표현성이 고루 갖춰진 동양적 미학관과 도광(韜光)의 미덕이 숨어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국립무용단의 무용극 『명성황후』(국수호 안무)에서 명성황후 역으로, 『오셀로』(국수호 안무)에서 데스데모나 역으로 출연하였다. 적당한 키의 슬림한 지체(肢體)에 모란처럼 수려한 용모를 갖춘 김현자는 무대에서 반짝이는 눈빛과 더불어 보석이 되고 안개가 되며 때로는 여성 투사가 된다. 그의 무대 연기의 폭은 매우 다채로우며 대체로 예리한 이미지가 두드러졌다. 그의 맵시있는 동작들에 감춰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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