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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金惠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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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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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서울 |
|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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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무용과 졸업, 영국 로얄발레 어퍼스쿨 유학(1966, 국비장학생). 아메리칸 발레 씨어터 스쿨 유학 |
|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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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1962-1965). 취리히무용단 단원(1967-1969), 레 그랑 발레 카나디앙 단원(1970- 1972), 이화여대 부교수 역임(1995-1996). 캘리포니아 주립대 발레 전임교수(1977-1992), 국립발레단 2대 단장 역임(1993-1996). 세계무용연맹한국본부 회장(1998-).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초대원장(1996-) |
|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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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무용콩쿠르」 금상(1962, 『파우스트』의 알레그로 솔로), 제5회 일민예술상(2000, 동아일보 주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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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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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작
『흑과 백』(임성남 안무) 『사신(死神)의 독백』(임성남 안무) 『레실피드』 『목신의 오후』 『장미의 정』 『호두까기인형』 『백조의 호수』 『파우스트』『불새』 『토미』(페란드 놀트 안무) 외 다수.
안무작
『백조의 호수』(1993) 『에테르니테(영원)』(1993) 『까르미나 브라나』(1995) 『호두까기인형』(1995) 『라 바야데르』(1995) 외 |
김혜식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발레를 발레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점, 유럽과 캐나다의 직업발레단에 입단한 점, 그리고 미국 대학에서 전임교수로서 발레를 교육한 점이 그것이다. 그는 한국의 발레가 맹아기(萌芽期)로부터 정착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활동의 폭이 해외로 넓혀지도록 이바지했다. 해외에서 그의 활동은 한국인으로서는 선구적인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그가 한국의 무용인들로 하여금 해외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끔 자극했다. 1992년 귀국하고부터는 그는 한국 무용계가 해외와 교류하는 데 공헌했다.
그녀는 일반계 이화여중에 입학하여 무용반원으로 선발되었다. 당시에 무용반 담당 교사는 파조 이호순이었으며, 무용반에서 한영숙, 김천흥, 임성남, 권려성 그리고 김백봉 등의 무용가들로부터 여러 장르의 춤을 지도받았다. 중학교 1학년 때 그의 균형 감각과 곧은 자세를 눈여겨 본 임성남은 그에게 발레에 입문할 것을 권유하였다. 임성남은 일본에서 러시아 스타일의 발레 교육을 받았고 후에 초대 국립발레단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무용반에서의 춤 수련과는 별도로 그는 임성남의 사설 춤 스튜디오에서 발레를 배웠다.
대학을 졸업할 때 그녀는 이미 한국에서 그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게 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고전 발레를 더 수련하기 위해 영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 냉전 체제 아래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의 현실에서 발레리나의 해외 유학은 있은 적이 없었고 한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은 유학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춤계에서 촉망을 받던 김혜식의 영국 유학을 원로 무용가 조택원과 평론가 박용구가 발의하였고 김백봉, 김문숙 등 춤계의 중진들이 호응하여, 결국 그녀는 1966년 6월 대한민국 국비장학생으로는 최초로 발레 교육을 받기 위해 1년 예정으로 영국의 로열발레 스쿨로 떠났다.
김혜식은 원래 유학 기간을 1년으로 잡았으나 이 스쿨에서 몇 해 더 공부하고 싶었다. 로열 발레 어퍼 스쿨의 1년 수료 과정의 공개 시험에서 그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3막 결혼식 솔로)와 『백조의 호수』(흑조의 푸에테)를 추었다. 이 공개 수업을 참관한 사람들 사이에는 취리히 발레단의 예술감독 니콜라스 베리오조프(Beriozoff)가 있었다. 그녀의 춤을 본 베리오조프는 바로 김혜식에게 취리히 발레단에 입단할 것을 제안하였다.
1967년 9월 그녀는 취리히로 갔다. 1969년 7월까지 거의 3년 동안 그녀는 코리페를 거쳐 세미 솔리스트까지 이르렀으며, 『신데렐라』. 『코펠리아』. 『호두까기 인형』, 『봄의 제전』. 『미스 쥴리』 등의 발레작품과 「탄호이저」, 「아이다」, 「박쥐」 등의 오페라 그리고 여러 현대 발레에 출연하였다. 그가 출연한 『신데렐라』 파 드 되는 특히 호평을 받았다.
그 후 오디션을 통해 레 그랑 발레 카나디앙에 입단한 그녀는 세미 솔로이스트로 채용되었고 1970년에 솔리스트가 되었다. 여기서 그녀는 『파 드 캬트르』 『지젤』 등의 클래식 발레는 물론 모리스 베자르 등의 현대 발레와 발란신의 작품에도 출연하였다. 당시에 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이었던 페르낭 놀트(Fernand Nault)는 현대 발레 『카르미나 부라나』로서 이 발레단의 주가를 올려놓고 있었다. 특히 그는 록 발레 「토미」와 재즈 발레 「힙 앤 스트레이트(Hip & Straight)」를 안무하여 대조적인 논의를 촉발시키고 있었다. 페르낭 놀트는 김혜식을 염두에 두고 몇 작품을 안무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놀트가 그녀의 터뜨려지는 도약력과 어우러진 매력적인 우아미를 주목한 결과로 보이며, 그는 발레리나로서 점차 완숙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토미」에서 주역, 「힙 앤 스트레이트」에서도 주역을 맡았고 이 공연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972년, 캘리포니아의 프레즈노로 이주한 그녀는 1973년에 프레즈노 발레단(Fresno Civic Ballet)의 출연요청을 받고 『호두까기인형』에 출연했으며, 그 후 이 발레단에서 몇 해 동안 안무를 지도하고 실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후 1977년에 그는 프레즈노 주립대 발레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1992년까지 재직했다. 그 사이에 소품들을 안무하고 프레즈노 포터블 댄스 그룹의 객원안무가로 활동했다.
1993년 김혜식은 한국의 국립발레단 제2대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국립발레단의 고전 발레 레퍼토리들에 새로운 옷을 입히는 한편으로 발레단에는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다수의 발레 유망주들을 발굴하면서 한국의 공립 무용단에서 잘 시도되지 않았던 후원 시스템을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그녀는 국립발레단을 위해 현대발레 『에테르니테』를 안무했다. 고전 발레 테크닉이 현대음악에 따라 변전을 거듭하는 『에테르니테』는 국립발레단의 변신을 기대한 사람들의 주문에 호응하였다. 취리히와 몬트리올에서 여러 해 동안 현대 발레를 익힌 그녀의 경험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인간 삶의 희로애락과 영원에 대한 염원을 강한 어조의 움직임과 변화가 많은 집단의 동선(動線)으로 표출하였다. 콘트라스트와 적절히 배합된 강력함은 국립발레단의 잠재력을 무리없이 보여주었다.
김혜식이 국립발레단 단장을 맡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한국의 문화부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학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Korean Nat’l Univ. of Arts)를 설립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전반적으로 대학 과정에서 전문적인 예술 교육이 결여된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문화부는 1993년 KNUA의 음악원(School of Music)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1996년에 무용원(School of Dance)을 세웠고 그녀는 무용원의 초대 원장에 임명되어 국립발레단장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개성을 살린 교육과 동양 체형으로 라인을 살리는 실기 교육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가 해외에서 쌓은 공연 및 교육 경험은 무용원 운영 뿐만 아니라 한국 무용계의 해외 교류에서 적지 않은 자산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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