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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호 鞠守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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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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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전북 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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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예대 무용과 졸업,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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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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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서울예술단 예술총감독(1989-1990), 국립무용단 단장(1996- 1999). 국수호디딤무용단 이사장 겸 예술감독. 현 중앙대 무용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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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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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전북농악지도 대통령상(1970), 국무총리상 표창(1988, 88 올림픽개회식에서). ’95 최우수작품상(1995, 『명성황후』), 조선일보 주최 뮤지컬 대상 안무상(1996, 『광개토대왕』),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최우수예술가상(1996, 『오셀로』), 「세계공연예술제」 공로 인정 대통령 표창(1998).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최우수예술가상(1998, 『하얀초상』). 춤평론가협회 최우수작품상 선정(1998, 『티벳의 하늘』), 한국춤평론가회 특별작품상 선정(2002, 『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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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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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작
『별의 전설』(1973, 송범 안무) 『왕자호동』(1974, 송범 안무) 『처용』(1974, 문일지 안무) 『사의 승무』(1974, 송범 안무) 『심청전』(1975, 김백봉 안무) 『춘향전』(1976, 송범 안무) 『원효대사』(1976, 강선영 안무) 『마음속에 이는 바람』(1977, 송범 안무) 『푸른 천지』(1978, 송범 안무) 『황진이』(1980, 강선영 안무) 『마의 태자』(1981, 최현 안무) 『썰물』(1982, 송범 안무) 『도미부인』(1984, 송범 안무), 『은하수』(1986, 송범 안무) 『가사호접』(1986, 조택원 안무) 외 다수
안무작
『농악』(1971) 『풍물놀이』(1982) 『승무』(1982) 『학의 발자국 소리』(1982) 『열』(1983) 『허상의 춤』(1983) 『무학동』(1983) 『무녀도』(1984) 『북의 대합주』(1985) 『북한강가에서』(1986) 『대지의 춤』(1987) 『면암의 명상』(1987) 『하얀 초상』(1988) 『노스토이』(1988) 『초혼가』(1988) 『땅의 소리춤』(1989) 『드들강의 연가』(1989) 『형상의 불』(1989) 『백두산 신곡』(1990) 『풍물소리 춤』(1990) 『예악』(1991) 『태평산조』(1991) 『지신지신』(1991) 『봄의 제전』(1991) 『무어랑의 바람』(1992) 『한량무』(1992) 『혼의 바다』(1993) 『명성황후』(1994) 『신무』(1994) 『황혼의 노래』(1995) 『오셀로』(1996) 『한국천년의 춤Ⅰ』(1996) 『한국천년의 춤Ⅱ』(1997) 『동양 3국의 북춤』(1997) 『여명의 한국』(1997) 『한국 천년의 춤Ⅲ』(1998) 『티벳의 하늘』(1998) 『아름다운 한국』(1998) 『영고』(1999) 『한국의 산하』(1999) 『일월성』(2000) 『신무 Ⅲ』(2000) 『시원의 춤』(2000) 『환생』(2001) 『금오신화』(2001) 『무천』(2001) 『한국환상』(2002) 『국수호의 볼레로』(2003)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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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국수호와 그가 이끄는 디딤무용단의 활동은 개인 안무가요, 민간 무용단이라는 수준을 초월해, 창의적이고 기동력 있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국내 무용단들의 활동상황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분명 그들은 어느 직업무용단이나 어느 민간무용단 보다 더 많은 공연 활동을 국내외에 펼쳐 보이고 있는 듯 싶고, 또 분주하게 외부로부터 초대받고 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말이 민간무용단이지 디딤무용단의 활동은 그들 활동에 대한 단원들의 자부심에 있어서나 무용단의 기획 기동력에 있어 거의 매번 형식적인 활동에 머물고야마는 국·시립 직업무용단의 활동수준을 몇 배나 웃돌고 있다고 본다. 특히 이 무용단이 추구하고 있는 예술방향인 한국무용계에서는 더 그러하다.
가령 1992-1993년도만 해도 그렇다. 그들은 한국적 춤동작과 보다 분방한 춤동작을 조합, 비평적 논란을 일으킨 『봄의 제전』(스트라빈스키 음악)을 1992년 5월 국내에서 초연한 후, 그것을 러시아 볼쇼이극장에서 선보였다. 이어 같은 공연을 국내에서 리바이벌하면서 그들은 몽고에 이어 1993년 겨울에는 『혼(魂)의 바다』와 같은 작품을 가지고 미수교국인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공연을 감행했다. 그 사이 광양만제철소 같은 곳에 초청되어 그들은 그들 춤의 레퍼토리를 근로자들에게 선보였고, 곧이어 대전엑스포 예술행사에서도 일익을 담당했다. 물론 그 사이에도 한 두 번 일본 공연을 한 것으로 안다. 이러한 사실은 듣기에도 벅찬 놀라운 춤활동의 범위이고, 사실상 모두 미수교국인 러시아, 몽고, 베트남을 일개 민간무용단으로 차례차례로 공연을 갖고, 어떤 형식으로든 그곳 예술인들과 연결되는 문화 외교력을 발휘하였다는 것은 무엇보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끊임없이 앞을 내다보고, 움직이는 것’, 이것은 안무가 국수호나 그를 따르는 디딤무용단의 활동목표인지 모른다.
안무가 국수호의 그런 기획력과 기동력은 그의 오랜 직업무용단에서 생활(국립무용단에서 16년 간, 88서울예술단에서 예술총감독으로 2년 간)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겠지만, 특히 오늘의 -90년대도 이미 4년째로 접어드는 - 시각에서 볼 때 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달리 말해 무용사적 입장에서 ‘송범 이후’의 공백을 같은 남성무용가로서 그나마 어느 정도 채워주고 있음으로 해서다. 90년대 들어서 춤계의 공연활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보다 ‘구체적인 목표’가 잘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안무가 국수호의 개인적 노력이나 디딤무용단의 활동은 어떤 구호나 말이 아니라, 곧바로 예술적 실천을 통해 우리 춤계의 의미있는 것들을 던져주고 있다고 본다.
또한 그는 우리 춤계에 특이하게도, 또한 지속적으로 연극계와 밀접하게 공동작업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지속적인 연극 연출가들과의 공동작업은 안무가 국수호를 우리가 다른 시각에서도 바라보고 평가하게 만든다. 즉 그 하나는 그가 우직스러울 정도로 한국문화 내지는 동양문화의 ‘다면적 측면들’을 그의 춤예술 속에 포괄해서 다루려 하고 있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는 단순한 춤예술인 범위를 넘어 ‘종합적 무대예술인’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춤·연극에 걸쳐 그 활동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면적 주제 접근들을 안무가가 자신의 춤 속에 포괄해서 다루려고 할 때 춤의 형식보다는 주제나 혹은 내용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불거지게 되고, 또한 이 안무가가 극적 상황의 전개나 소도구 등 무대적·연극적 상징물의 사용에 능하기 때문에 춤이 보다 극적으로 흐를 우려도 없진 않지만, 이 안무가의 경우는 춤의 형식적 측면이나 내용적 면을 비교적 잘 융합시키고 있고, 또한 극적 상황을 춤에 이끌어 들임에 있어 오히려 그는 『무녀도』 『하얀 초상』 『대지의 꿈』 같은 작품 속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선명히 극장예술가로서 무용극의 효능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극적 전개를 가진 집단무를 자신의 춤의 ‘예술적 스타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의 「국수호의 춤 30년」이란 기념공연의 의미는 최근 그의 대담해져 가고 있는(긍정적인 측면에서) 예술인으로서의 노력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예술이나 예술가는 결코 천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즉 1할을 뺀 9할 이상의 자신의 노력- 예술을 향한-에 의해 성장되고 완성되어 간다는 사실을 나는 그를 보면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것이 그를 우리 주위에서 실로 보기 힘든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예술가적 춤꾼’으로 첫 손꼽고 있는 이유이다. - 김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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