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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준 韓成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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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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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충남 홍성 |
|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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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명고수(名鼓手) |
|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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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니폰사(モダン日本社) 제정 예술상 (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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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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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작
『승무』 『태평무』 『학무』 『한량무』 『신선무』 『살풀이』 『검무』 『오방신장무』 『사공무』 『바라춤』 『훈련무』 『오신장무』 『서울무당춤』 『시골무당춤』 『생원춤』 『서울딱딱대기』 『취발이춤』 『영남덧뵈기춤』 『정승춤』 『왕의 춤』 『춘앵무』 『항장무』 『선녀춤』 『노처녀춤』 『농부춤』 『도련춤』 『사무(寫舞)』 『軍奴使令춤』 『하인무』 『금부나장춤』 『생원춤』 『대전별감춤』 『홍패사령춤』 『진사춤』 『하님춤』 『화장아(火場兒)춤』 『창부(唱夫)춤』 『급제춤』 『염불춤』 『팔폭장삼춤』 『상가승무노인기무(喪歌僧舞老人器舞)』 『쾌지나칭칭춤』 『영산회상춤』 『타령춤』 『굿거리북춤』 『상쇠춤』 『곱새춤』 『행장춤』 『북춤』 『사고무(四鼓舞)』 외 |
한성준은 서구식인 극장무대를 모르는 한말에 태어나 당굿 마당에서 춤추며 자라 원각사, 부민관, 일본 히비야 공회당 등 서구식 극장무대에서 춤춘 사람으로, 말하자면 양세대에 걸쳐 무용생활을 한 이색적인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그는 역사의 전환기에 살면서 최초로 한국무용을 무대공연예술로 끌어올린 인물로 그의 모든 예술활동은 직·간접적으로 가정환경과 혼란한 주변생활의 영향을 받은 바 컸다.
한성준은 8세 때 북채를 잡고 외조부 백운채(白雲彩)에게 북을 배우다가 뒤에 박순조(朴順祚)에게 사사했다. 17세 때 명고수가 되어 5년 동안 15차의 창방(唱榜)을 치르고 1910년대에 들어 협률사(協律社)·연흥사(延興社) 등 창극단체에서 김창환(金昌煥)·박기홍(朴基洪)·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 등의 고수를 지냈다.
창극의 장단으로 평타령·중모리·진양조·엇모리·휘모리 등에 특히 능했으며 창·명무(名舞)로도 이름을 떨쳤고, 1933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 창립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 조선무용연구소를 창설하여 민속무용에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특히 이시이 바쿠(石井漠)에게 현대무용의 기본테크닉을 배운 최승희(崔承喜)에게 조선의 춤과 민족혼을 불어넣어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세우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는 무용에서도 혁신적인 체계와 기초를 세웠는데, 1935년 부민관에서 첫 작품발표회를 가진 이후, 1940년에는 제자들과 함께 일본의 동경 히비야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여 일본인들이 조선춤을 재평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말년에는 민속무용에 전념하여 흩어져 있던 무용의 체계를 세워 『승무』(僧舞)·『학무』(鶴舞)·『태평무』(太平舞) 등의 여러 무용을 무대화시켰다. 특히 학춤에 뛰어났다.
그의 제자들로는 한영숙, 강춘자, 권오봉, 이강선, 조금향, 장홍심, 김천흥, 최승희, 조택원, 김보남 등이 거명되고 있다.
한성준의 무용사적 공헌을 무형적 가치창출을 중심으로 부각시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민속예능인으로서는 최초로 양성적인 무용전수기관을 만들어 무용 저변확대와 후진양성에 힘써, 춤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와 예맥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산재해 있던 즉흥적인 무(無)체계의 우리 민속예능을 체계적으로 정리, 집대성하여 고유의 형식미와 틀을 다져내었고 이를 다시 무대화시켜 예술무용으로 승화시켰다. 셋째, 열린 시각으로 편성한 엄격한 교육과정 속의 즉흥무 시험의 시행을 꼽을 수 있다. 엄격한 형식 속에 얼마간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개성의 발휘나 창의성 개발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결국 예술적으로 빼어난 우리 춤의 교육뿐 아니라 창작의 가능성도 열어, 궁극적으로 세계인과 함께 할 수 있는 격이 높은 춤으로의 길을 제시한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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