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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희 洪禎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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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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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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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무용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경희대 박사학위 취득 |
|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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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블랑 창단(1980), 한국발레연구회 발족(1984), 한국발레연구회지 발간(1985), 전 이화여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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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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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작
『코리아환타지』(1971) 『처용무』(1972) 『코리아 환상곡』(1982) 『어떤 궤적』(1982) 『회귀의 성』(1982) 『교류』(1982) 『12인을 위한 소곡』(1982) 『원화』(1983) 『50 흔적』(1985) 『장생도』(1988) 『신시』(1988) 『라 바야데어』(재안무, 1988) 『레 실피드』(재안무, 1989) 『정』(1989) 『녹색의 불길』(1990) 『0의 세계』(1991) 『지젤』(홍정희 재안무, 1991) 『회귀의 성』(1992) 『조용한 대답』(1994) 외 다수 |
저술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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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서구 발레 발전에 공헌한 남성무용가론」(1966) 「발레용어사전」(1970) 「역사를 통해 본 발레의 예술성과 교육적 가치」(1985, 편저) |
발레가 우리 나라에 완전히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50-6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해방직후 중진 무용가들 대부분이 월북하거나 또는 외국으로 나감으로써 공백에 처한 국내 발레계는 이후 임성남을 정점으로 한 국립발레단과 홍정희, 김정옥을 축으로 한 대학발레(이화여대/세종대)로 양분화 된다. 그녀는 ‘한국최초’라는 타이틀을 경신하며 이화여대에 발레의 씨앗을 뿌려 왕성한 수목으로 자라나게 한 장본인이다. 시대적 불운을 타고난 홍정희에 대하여 김영태는 ‘가시밭 속의 장미’라고 평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피워 낸 ‘가시밭 속의 장미’는 이제 한 송이에서 몇 백 송이의 장미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풍성한 화원을 이루어냈다. 25여년의 역사를 지닌 발레블랑과 한국발레연구회를 축으로 한 한국 발레의 예술적 성취와 아카데미즘적 계몽의식이 이를 증명한다. 1997년 작고하기까지 약 90여 편의 발레 작품을 안무하며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발레예술을 꽃피운 그녀의 춤정신은 평론가 장광열의 지적처럼 ‘한눈 팔지 않는 마라토너’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홍정희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한국춤 역사상 최초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점, 최연소의 나이인 26세 때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로 부임한 것이 그 예가 된다. 그녀는 학창시절부터 이화여대의 자존심이었고, 또 무용교육자가 되어서는 예술창작의 정신적 지도자로 군림했다. 그녀의 생애와 춤활동은 최근 30여년 동안 진행된 한국발레의 성격과 경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창작발레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려 했는데, 이는 1960년대 이후 한국 발레계의 창작 화두와 그 맥을 같이한다. 민족 정서에 입각한 민담이나 설화 등을 소재로 이끌어와 안무했는가 하면, 일상성을 소재로 하여 작품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품 경향 면에서 그녀는 예술지상주의자 내지 탐미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90여편의 작품 중, 먼저『사슴호의 전설』(1958)은 그녀의 데뷔작으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창작발레이자 민족발레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제1회 홍정희 무용발표회에 선보인 작품 대부분도 한국적인 색채가 강하게 묻어난다. 또, 아들을 얻은 기쁨과 감동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환상의 장』(1969), 『자장가』(1969) 등은 자신의 일상생활의 체험을 내면화했다는 점에서 관심이 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여타의 작품들과 달리 『종달새』(1982)는 그동안 그녀가 안무한 작품 중 처음으로 남성무용수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화여대 특성상 제자 중에 남성무용수가 없었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외부 출연형식으로 3명의 남성무용수를 작품에 출연시킨 것이다. 같은 해에 초련된 『원화』는 박성옥의 철가야금산조의 고야한 음률을 배경으로 여성적 기개를 터득하려 했던 옛 원화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작품의 소재와 전개, 음악사용 등에서 한국적 정감이 짙게 나타난다.
당시를 풍미한 고전적이고 우아한 분위기의 발레 본연의 색채를 강조한 작품과는 달리 현대발레의 성향을 띤 작품으로는 『어떤 궤적』(1982)과 『역류』(1976)를 들 수 있다. 우선 『어떤 궤적』에서 흰색 의상은 한복의 단아한 곡선의 이미지를 살렸고, 부드럽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한국적 정감을 물씬 풍기게 하였다. 평론가 김영태는 그녀 자신이 살아온 순간들의 어떤 순간을 지피게 하는 그런 춤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떠받드는 지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한 번 확인해 보는 마음의 이행으로 나타난 자화상과 같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스트라빈스키의 현대음악을 사용한 『역류』는 그녀 안무작에서 단연 현대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요즘에 현대발레의 창작경향과 흡사한 안무방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녀의 창작정신을 짐작케 하는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감성적 발레의 특성을 강조한 『아가』(1978)는 한국춤의 이미지를 접목함으로써 발레 미학의 진수를 아낌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또한, 그녀는 고전발레 재현보다는 창작발레 공연에 더 주력했다. 마리우스 프티파 안무의 『라 바야데르』(재안무, 1988)를 2막 2장 망령의 궁전을 각색하여 재안무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을 감상한 이순열은 2막2장은 무희 니키아의 비극이 무엇인지 관객들은 수렴하기 어렵지만, 여기서 추어지는 니키아와 솔로 남성 무용수의 2인무는 홍정희 재안무의 절정을 이뤘다는 평가를 내렸다. 『라 바야데르』 전막 공연이 국내에 초연된 것이 극히 최근이라는 점에서 1980년대 이 작품을 부분적이나마 공연을 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선구자적 면모를 읽게 하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시적 감수성이 한껏 녹아나 있는 『신시』는 그녀의 작품목록 중 명작의 하나로 시적 감수성과 창조의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한국적인 발레의 가능성을 모두 함축했고 예술적 또는 미학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은 나무 위에 동네를 설정하고 이를 몸의 언어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즉, 나무 위로 날아올라 그곳에 마을을 형성하려 한 무한대적 상상력이 높이 평가된다는 것이다. 『신시』는 바로 날아오르고 추락하는, 그 경계의 지점에서 유발되는 갈등, 대립, 고통 등이 주제가 된다. 그동안 한국발레는 그저 서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원초적 뿌리는 부재했었다. 그녀가 이 작품을 통해 한국발레의 뿌리를 굳건히 하겠다는 의지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평할 수 있다.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구현한 작품으로는 『코리아 환상곡』(1971)과 『장생도』(1988)가 단연 손꼽힌다. 『코리아 환상곡』은 초연 당시 표제무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구성과 개성있는 안무를 보여줘 갈채를 받았다. 『코리아 환상곡』이 작품의도와 주제성에 비중을 두어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구현했다면, 『장생도』에서는 주제성뿐만 아니라, 안무 및 움직임의 기법적 측면까지 민족적 정서 및 한국적 미감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순열은 발레는 원래 서양양식을 띠고 있지만,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자국의 민족적 또는 민속적 특성을 가미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면, 『장생도』 역시 그러한 의도에서 안무된 작품으로 특히 타악기만으로 구성된 한국장단에 맞춘 사랑의 2인무 장면을 높이 샀다.
둘째, 1960년대 이후 한국 발레의 성장과 발전은 크게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 등과 같은 직업바레단과 아카데미즘권을 중심으로 한 동문발레단이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에 의해 견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때에 발레블랑 창단은 그녀의 발레인생의 또다른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발레블랑은 홍정희를 대표로 하여 김민희, 김정숙, 김화례, 김명회, 신정희, 이양출, 조윤라, 최미리, 신은경, 박승순, 이양희 등 모두 11명의 제자들이 창단멤버로 참여했다. 이들은 새로운 창작발레 세대층을 형성하며 한국 발레, 특히 창작발레계를 이끌었다. 특히 창작발레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클래시즘에 입각한 활동이 위주였던 점에 비춰보면, 발레블랑의 다양한 주제에 입각한 발레의 형식적 변주를 꾀한 창작은 궁극적으로 한국 발레의 창조의 지층을 두텁게 하는데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홍정희 문하를 거친 대다수의 제자들이 각 대학의 무용과 교수로 부임하여 무용교육자로 활동하거나, 또는 춤창작의 현장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이화여대 발레계보학’을 얘기할 정도로 탄탄한 줄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서양춤을 대표하는 발레를 전공함에 있어 유학을 하지 않고서도 일가(一家)를 이룬 독보적인 존재다. 토종인 채 ‘눈동냥’으로 체득한 실력으로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이순열은 그녀의 존재는 마리우스 쁘띠빠를 상회하는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아울러 그녀는 자존심 강한 예술가이기도 했다. 자존심 강한 예술가에게 있어 평론가의 혹평은 견디기 어려운 도전이다. 그러나 그녀의 자존심은 평론가의 혹평을 겸허하게 수용할 줄 아는 포용력 있는 자존심이었다. 이순열은 자신이 가한 혹평에 대해 무용가 스스로 당신의 관점이 옳았소라고 인정한 이는 그녀가 유일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렇듯 평론가의 시각을 인정할 줄 아는 도량을 가졌지만 자신의 예술창작 만큼은 언제나 엄격했다.
1998년 홍정희 선생 1주기를 맞아 제자들이 주축이 된 사단법인 한국발레연구회는 추모공연과 함께 추모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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